위의 사진은 재연 사진이며 뒤에 앉은 사람은 기자임
그리고 아래 글은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서 퍼 온 글임을 밝힙니다^^~~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ouise McCauley Parks)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그녀는 “현대 인권 운동의 어머니”라고 칭송됨
당시의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 악법인,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나쁜 법인 짐 크로우법에 의해 흑인과 백인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 생활하였다.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 교통수단도 마찬가지였는데, 겉으로는 나눠있지 않으나 앉는 자리를 분리하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흑인 어린이들에게는 학교버스가 아예 제공되지 않아 걸어다녀야만 했다. 흑인들은 흑인을 백인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차별을 매일 겪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로자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는 매일 같이 그 버스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어요...그러나 내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이었고 이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지요. 그 버스는 내게 세상이 검은 세상과 하얀 세상으로 나뉘어 있다는것을 실감하게된 계기였습니다."라고 한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는 일하던 백화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버스 안에서도 흑백 좌석 차별이 존재했다.
버스 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버스 앞에서부터 네 줄은 반드시 백인들만이 앉아야 한다. 설렁 버스 안이 비어 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한다.
버스가 차면 흑인들은 백인들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야 한다.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경우 앞에서 뒤로 걸어가면 백인들의 심기를 거슬릴 수 있으므로 앞문 쪽으로 가 요금을 내고 내린 뒤 뒷문으로 다시 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흑인이 내리면 버스 기사가 흑인을 무시하고 돈만 받고 버스를 출발시키는 경우도 상당했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은 이 사건으로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을 결의하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당국은 로자 파크스에게 불법 보이콧을 했다는 명목으로 14달러라는,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는 납부하기 어려울 정도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 결정은 오히려 버스 보이콧 운동에 불을 지피는 결과만 낳았다.
로자 파크스 이전에도 흑인들이 당하는 부당한 권리침해에 맞서 싸운 소시민들의 사례가 있었고 흑인 인권운동가들이 이를 부각시키려 한 적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이전 혹은 이후의 그릇된 행실 때문에 묻혀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비효과 문서에도 적혀 있는 클로뎃 콜빈. 로자 파크스 사건 8개월 전에 같은 이유로 체포된 사례인데, 문제는 15세에 미혼으로 임신을 한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재키 로빈슨에서 알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사건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물을 대표로 내세워야 성공가능성이 생긴다. 결국 당시 시민단체들은 조용히 뒤로 빠졌다. 로자 파크스는 이전에도 이런 결격 사유가 없었고, 버스사건 이후에도 모범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유지했기에 대중으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은 케이스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저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며, 힘들다 하더라도 그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느날보다 더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종종 나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든 사람도 아니었다. 난 마흔두 살이었다. 내가 정말로 피곤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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